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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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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쇼운은 16세기 일본의 무장으로, 오토모 가문의 가신이자 다카하시 가문의 당주였다. 그는 다치바나 도세쓰의 보좌역으로 지쿠젠 지방을 다스렸으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특히 1586년 이와야 성 전투에서 시마즈 군에 맞서 763명의 병력으로 항전하다 전사하여, 충절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양자로 받아 다치바나 가문을 잇게 했으며,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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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쇼운
기본 정보
덴소지 소장
덴소지 소장
이름다카하시 쇼운 / 다카하시 시게타네
별명센주마루 (유명)
요시히로 야시치로
시게사토, 다카하시 시게타네
쇼운 (호)
이명야시치로 (통칭)
미카와 뉴도
슈젠 효에
슈젠 뉴도 (가명)
별칭난세의 꽃
풍신
군신/전신의 화신
궁시 하치만/마리시텐의 화신
시호쇼운, 쇼운
신호삼암령신, 성해령신
계명덴소인덴 쇼운다이코지
묘소후쿠오카현다자이후시의 사이쇼지
이와야성 니노마루 터의 다카하시 쇼운 무덤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의 덴소지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의 쇼운지
관위슈젠노카미
막부무로마치 막부
주군오토모 소린 → 요시무네
씨족요시히로 씨 → 다카하시 씨
가족아버지: 요시히로 아키사토
어머니: 오토모 요시아키의 딸
형제자매요시히로 시게자네
쇼운
사쿠라이 마사쓰구의 부인
도쓰구 시게히데의 부인
손주인 (오토모 요시무네의 부인)
배우자정실: 사이토 시게자네의 여동생, 소운인
측실: 하기오 대학의 딸, 마쓰오도노[이설]
자녀다치바나 무네시게
무네마스
이치로마루 (무네시게)[이설]
모 (아들)[이설]
가이/신게인 (다치바나 시게이에의 부인)
오치요/에이초인 (오다베 무네후사의 부인)
다이세인 ( 오토모 요시노리의 부인)
가야/지코인 (다치바나 지카이에의 부인 후 호소카와 오키모토의 부인)
생몰
출생덴분 17년 9월 24일 (1548년10월 25일)
사망덴쇼 14년 7월 27일 (1586년9월 10일)

2. 생애

덴분(天文) 17년(1548년), 오토모 요시아키(大友義鑑)의 중신 요시히로 시게마사(吉弘鑑理)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요시히로 시게타네'''(吉弘鎮理)였다.[5] 그는 분고국의 오토모 씨 가문을 섬겼으며, 당시 가문의 수장은 오토모 소린이었다.

에이로쿠(永禄) 10년(1567년) 다카하시 아키타네(高橋鑑種)의 모반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주군 오토모 소린의 명으로 다카하시 가문을 상속받아 성을 다카하시로 바꾸고 이름도 '''쇼운'''(紹運)으로 고쳤다. 이와 함께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만 성(宝満城)을 영지로 받아 성주가 되었다.[5] 이후 기타큐슈 방면의 군권을 위임받은 다치바나 도세쓰의 보좌역으로서 지쿠젠 지역 통치에 힘썼다. 그는 카마치 아키모리(蒲池鑑盛)와 더불어 오토모 가문의 "'''위대한 기둥'''"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덴쇼(天正)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에서 오토모 가문이 시마즈 가문에게 대패하여 세력이 약화되자,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 쓰쿠시 히로카도(筑紫広門), 아키즈키 다네자네(秋月種実) 등 주변 세력들이 오토모 영토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쇼운은 원군을 기대하기 어려운 고립된 상황 속에서도 다치바나 도세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침공을 격퇴하며 지쿠젠 지역을 지켜냈다.

덴쇼 9년(1581년), 아들이 없던 도세쓰의 거듭된 간청으로 장남 무네토라(統虎)를 도세쓰의 양자로 보내 다치바나 가문을 잇게 했다.[2][3][4] 이는 쇠퇴하는 오토모 가문을 지키기 위해 다카하시 가문과 다치바나 가문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도세쓰의 의지를 쇼운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덴쇼 12년(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전사하자, 쇼운은 도세쓰와 함께 지쿠고 탈환에 나서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덴쇼 13년(1585년) 도세쓰가 진중에서 병사하고, 쓰쿠시 히로카도가 호만 성을 공격해오자 지쿠고 원정을 중단하고 지쿠젠으로 돌아와야 했다.

덴쇼 14년(1586년), 규슈 통일을 노리던 시마즈 요시히사는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쇼운이 지키는 이와야 성을 공격했다(이와야 성 전투). 쇼운은 763명이라는 압도적으로 불리한 병력으로 시마즈 군의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5] 약 보름간 치열하게 항전했으나, 결국 7월 27일 성은 함락되고 쇼운을 포함한 모든 병사가 전사(옥쇄)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쇼운의 이러한 최후는 적군이었던 시마즈 측에서도 그의 용기와 충절을 높이 평가하게 만들었다.

2. 1. 출생과 가문 상속

덴분 17년(1548년), 오토모 요시아키의 중신 요시히로 아키사다의 차남으로 분고국 카케히 성[17]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지츠리'''(鎮理)로, 주군 오토모 소린(당시 요시시게)과 아버지 아키사다에게서 한 글자씩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오토모 요시카네의 딸이었고, 여동생은 카나리 기쿠히메였다.

13세 때인 에이로쿠 4년(1561년) 모지 성 전투에 첫 출진하였다[18]. 에이로쿠 10년(1567년), 오토모 가문의 가신 다카하시 아키타네가 부젠국, 지쿠젠국, 히젠국의 고쿠진들과 연계하여 모반을 일으키자, 아버지 아키사다와 형 요시히로 시게노부와 함께 출진하여 공을 세웠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타치바나 아키노리 토벌전에서는 야습 작전 중 자신의 주먹밥을 부하들에게 나눠주며 사기를 높였다는 일화가 있다[19].

에이로쿠 12년(1569년), 주군 오토모 소린의 명으로 다카하시 씨 가문을 상속받아 성을 다카하시로 바꾸고, 이름도 '''쇼운'''(紹運)으로 고쳤다[20]. 이와 함께 이와야 성과 호만 성을 영지로 받았다[21]. 이후 기타큐슈 지역의 군권을 위임받은 다치바나 도세쓰의 보좌역으로서 지쿠젠국 지배에 공헌하였으며, 오토모 가문 내에서 카마치 아키모리와 더불어 "'''위대한 기둥'''" 중 하나로 여겨졌다.

2. 2. 오토모 가문의 위기와 쇼운의 활약

덴쇼 6년(1578년) 미미가와 전투에서 오토모 가문이 시마즈 가문에게 대패하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21] 이 대패로 쇼운의 형 요시히로 시게노부, 의형 사이토 시게자네, 그리고 오토모 가문의 중신인 카쿠구마 세키소, 사에키 코레노리, 타키타 시게치카 등 다수의 유력 무장들이 전사했다. 오토모 가문의 쇠퇴를 틈타 히젠류조지 다카노부, 지쿠고쓰쿠시 히로카도, 지쿠젠의 아키즈키 다네자네 등이 오토모 영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쇼운은 삭발하고 '''쇼운'''(紹運)이라고 칭했다.

당시 주군 오토모 소린은 휴가와 지쿠고 방면에서 시마즈 및 류조지 군대와 교전 중이었기에 지쿠젠 방면으로 원군을 보내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쇼운이 지키던 이와야 성(岩屋城)과 호만 성(宝満城) 일대는 적대 세력에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였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쇼운은 다치바나 도세쓰와 긴밀히 협력하며 아키즈키 다네자네, 쓰쿠시 히로카도, 하라다 다카타네, 류조지 다카노부, 소마 씨사다, 아소 모토시게 등 주변 적대 세력의 침공을 여러 차례 격퇴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21] 덴쇼 6년(1578년) 말부터 덴쇼 12년(1584년)까지 쇼운과 도세쓰는 아키즈키, 치쿠시, 하라다, 류조지 등 주변 세력과 치쿠젠 각지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주요 전투로는 시바타강 전투[31][32][33], 호만 성 방어전[34][35][36], 다자이후 및 이시자카 전투[40][41][42][92][93], 아라히라 성 공방전[40][41][46], 이케마츠바라 전투[49][53], 카마·호나미 전투[79][80] 등이 있다. 쇼운은 카마치 아키모리와 함께 오토모 가문을 지탱하는 "위대한 기둥" 중 하나로 여겨졌다.

덴쇼 9년(1581년), 아들이 없던 도세쓰는 쇼운에게 그의 적남 무네토라(훗날의 다치바나 무네시게)를 양자로 삼아 다치바나 가문을 잇게 해달라고 간청했다.[146][147][148] 쇼운은 무네토라가 다카하시 가문의 중요한 후계자였고 그의 뛰어난 자질을 알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거절했다. 그러나 쇼운이 아버지처럼 따르던 도세쓰가 오토모 가문의 미래와 다치바나, 다카하시 두 가문의 결속을 위해 거듭 간청하자 결국 이를 수락했다.[3]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도 이 양자 입양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2] 이로써 다카하시 가문은 차남 다카하시 무네마스(훗날의 다치바나 나오쓰구)가 잇게 되었다.

덴쇼 12년(1584년),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 다카노부가 시마즈 가문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자, 오토모 소린은 이를 지쿠고 영토 회복의 기회로 삼았다. 소린의 명으로 쇼운은 도세쓰와 함께 약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쿠고 탈환을 목표로 침공을 개시했다. 이들은 험준한 산길을 넘어[149] 아키즈키, 치쿠시 연합군의 매복을 격파하고(타누시마루마치・가타세, 에리와타시구치・이시가키표의 전투) 빠르게 진군하여 8월 24일 네코오 성의 지성인 다카무레 성을 함락시켰다.[150] 이후 이누오 성의 가와사키 시게타카도 항복했으며, 코라산 좌주 단바 료칸 등 지쿠고의 여러 세력들이 오토모 군에 가담했다.[151][152][150][153] 9월 1일에는 네코오 성 본성도 함락시켜 성주 구로키 이에나가는 자결했다.[158][159][160] 이후 야마시타 성, 타니가와 성 등 지쿠고의 여러 성들을 공략하거나 항복시키며[151][152][150][153] 지쿠고 대부분 지역을 회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야나가와 성과 같이 저항이 완강한 거점도 있어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156] 덴쇼 13년(1585년) 2월부터 4월까지는 류조지, 아키즈키, 치쿠시 등 히젠, 치쿠젠, 지쿠고, 부젠 연합군 약 30,000여 명의 대군과 코모리노[166][167], 주산부[168], 센본스기 등지에서 수많은 격전(통칭 츠츠카와 합전 또는 구루메 합전)[169][170]을 벌였다. 도세쓰와 쇼운이 이끄는 오토모 군은 약 9,800명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법과 전술을 활용하여 여러 차례 국지전에서 승리하며 적에게 타격을 입혔지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171][172][173]

하지만 덴쇼 13년(1585년) 9월, 다치바나 도세쓰가 코라 산 진중에서 병사하면서[174][175][176][177] 상황은 급변했다. 미미가와 전투 이후 경험 많은 장수들이 부족했던 오토모 군에게 도세쓰의 죽음은 큰 타격이었고, 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었다. 도세쓰의 죽음을 기회로 본 쓰쿠시 히로카도가 쇼운의 거성인 호만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178][179], 쇼운은 지쿠고 원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환하여 호만 성을 탈환했다. 이후 쇼운은 히로카도와 화의를 맺고, 그의 딸 가네(加禰)를 차남 다카하시 무네마스(다치바나 나오쓰구)의 정실로 맞이했다.[180][181]

이 무렵, 오키타나와테 전투에서 승리하며 세력을 키운 시마즈 가문은 덴쇼 14년(1586년), 오랜 숙적이었던 오토모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키기 위해 대규모 북진을 개시했다.[5] 시마즈 군의 주력은 쇼운이 지키는 이와야 성으로 향했고, 쇼운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2. 3. 이와야 성 전투와 최후

덴쇼 14년(1586년), 시마즈씨는 오토모씨를 멸망시키고자 2만이 넘는 대군[182][183](일설에는 약 3만 5천 명)을 이끌고 다자이후로 북상했다. 다카하시 쇼운은 방어가 취약한 이와야 성에서 불과 763명의 병력으로[5] 시마즈 대군을 맞이했다. 시마즈 군은 쇼운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불교를 가볍게 여기고 기독교를 믿는 부정한 오토모 씨를 어찌 섬기는가? 그대의 용맹함은 이미 증명되었으니, 항복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쇼운은 "강력할 때는 주군과 그의 씨에게 충성과 헌신을 맹세하고, 약해지면 그 씨를 배신하는 자들이 많지만, 나는 주군과 그의 씨에게 은혜를 입었기에 그런 짓을 할 수 없다. 은혜를 모르는 사무라이는 짐승보다 못하다."라고 답하며 단호히 거절했다.

이후 약 보름간 이와야 성 전투가 벌어졌다.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쇼운과 다카하시 군은 용맹하게 항전했다. 당시 전투의 격렬함은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 『지쿠젠 속 풍토기』: "종일 종야, 조총 소리가 끊이지 않고, 병졸들의 외침 소리는 대지도 울릴 정도였다. 성 안 병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목숨 걸고 싸웠다. 특히 조총 사격술이 뛰어난 자가 많아, 적들은 방패 뒤에 숨거나 대나무 다발로 엄폐하며 접근하다 많이 죽었다."
  • 『호쿠히 전기』: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으나, 이 성은 매우 견고한 요새이고 성주는 비할 데 없는 명장이라, 적은 병력으로 5만 대군에 맞서면서도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 『세이한 야사』: "쇼운은 웅대한 지략이 뛰어나,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여 사쓰마 군을 여러 번 격파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결국 7월 27일, 쇼운을 비롯한 다카하시 군 763명 전원이 전사하며 이와야 성은 함락되었다(옥쇄). 쇼운의 나이는 39세였다.[184][185][186][187][188][189] 시마즈 측도 큰 피해를 입었으며, 쇼운의 용기와 충절에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쇼운이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옥쇄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시마즈 측 기록인 『카미이 카쿠켄 일기』 덴쇼 14년 7월 26일 조항에는 쇼운이 성을 넘겨주지 않는 조건으로 강화 회담을 제안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쇼운의 묘소는 가신 후지우치 시게카츠가 세운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의 사이쇼지(西正寺), 이와야 성 니노마루 터의 다카하시 쇼운 묘, 아들인 야나가와번 초대 번주 다치바나 무네시게가 건립한 후쿠오카현 야나가와시의 텐소지(天叟寺), 손자인 미이케번 초대 번주 다치바나 타네츠구가 건립한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의 쇼운지(紹運寺) 등 여러 곳에 있다.

후손인 미이케번 7대 번주 다치바나 타네요시의 아들이자 시모테와타리번 2대 번주인 다치바나 타네아츠는 덴포 6년(1835년) 쇼운의 의로운 행적을 기리기 위해 신기하쿠(神祇伯)에게 청하여 쇼운에게 세이카이 레이신(性海霊神)이라는 신호(神号)를 추증받고 미카사 신사(三笠神社)를 창건했다. 이 신사는 메이지 유신 이후 미이케로 복귀하여 현재까지 무용의 신을 모시는 신사로 존숭받고 있다.

3. 인물 및 일화

다카하시 아키타네 高橋鑑種일본어의 뒤를 이어 다카하시씨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으며, 오토모 소린 大友宗麟일본어이 이끄는 분고국오토모씨를 섬겼다. 그의 아버지는 오토모씨의 중신 요시히로 아키마사 吉弘鑑理일본어였으며, 어머니는 오토모 요시아키 大友義鑑일본어의 딸이었다. 여동생으로 요시히로 키쿠히메 吉弘菊姫일본어가 있었다. 쇼운은 다치바나 도세쓰 立花道雪일본어와 함께 오토모 가문을 지탱하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이러한 공로로 지쿠젠국의 이와야 성 岩屋城일본어을 하사받았다.[5]
다치바나 도세쓰와의 관계쇼운은 무용(武勇)에서 다치바나 도세쓰에 뒤지지 않았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동료를 넘어 부자 관계에 가까웠다고 여겨진다. 도세쓰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쇼운의 장남 다치바나 무네시게 立花宗茂일본어를 양자로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 쇼운은 거절했지만, 도세쓰는 오토모 가문의 미래와 다치바나 가문을 이끌 후계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간청했다. 또한 도세쓰는 쇼운에게 아들이 많으니 무네시게를 다치바나 가문에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했다. 결국 쇼운은 이를 받아들여 무네시게를 도세쓰의 양자로 보냈다.[3] 이때 쇼운은 무네토라에게 「도세쓰 님을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르도록 하여라」고 말하고, 와키자시(脇差, 짧은 칼) 비젠나가미쓰 備前長光일본어[196][197]를 주며 「만약 도세쓰 님과 내가 싸우게 된다면 이 칼로 나를 찔러라」고 훈계했다고 전해진다.[198][199] 이후 무네시게는 도세쓰의 딸 다치바나 긴치요 立花誾千代일본어와 혼인하여 다치바나 가문을 계승했다.[2][4] 쇼운과 도세쓰는 후세에 풍신(風神, 쇼운)과 뇌신(雷神, 도세쓰)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인품과 일화


  • 부인과의 관계: 사이토 시게자네 斎藤鎮実일본어의 여동생(혹은 딸) 소운인 宋雲院일본어과 혼약이 정해졌으나, 계속되는 전투로 혼례가 미뤄졌다. 그 사이 소운인이 천연두를 앓아 외모가 달라지자 시게자네는 파혼을 청했다. 그러나 쇼운은 "나는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상냥한 마음씨에 반해 혼약을 결정한 것이다. 외모가 변했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며 예정대로 혼례를 올렸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 2남 4녀를 두었고, 소운인은 가신들에게 어머니처럼 존경받았다고 한다.[195] 쇼운의 보리사(菩提寺)인 야나가와시의 텐소지 天叟寺일본어에 모셔진 쇼운의 위패는 현재, 소운인과의 비익조 위패가 되었으며, 묘소도 부부가 합장되어 있다.
  • 충의와 지략: 미미카와 전투 패배 후, 필두 가로였던 기타하라 시게히사 北原鎮久일본어가 오토모 가문을 배신할 것을 권유했으나 쇼운은 거절했다. 아키즈키 다네자네 秋月種実일본어가 시게히사를 포섭하여 쇼운을 몰아내려 했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시게히사는 처형당했다. 쇼운은 시게히사의 아들 기타하라 타네오키 北原種興일본어에게 처형 경위를 설명하고 가문을 잇게 했다. 타네오키는 후에 쇼운과 협력하여 아키즈키 군의 야습을 격퇴하는 책략을 성공시켰는데(류가 성 야습전 龍ヶ城夜襲戦일본어과 겟포 나스미노진 芥浦茄子見の陣일본어[85][86][87]), 아키즈키 측의 우치다 히코고로 内田彦五郎일본어가 이끄는 300명의 군세는 쇼운과 타네오키의 매복에 걸려 우치다가 전사하고 30여 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201] 오명을 씻은 기타하라 타네오키는 그 후, 다카하시 가문의 중신으로 쓰이게 되었다.
  • 지략: 아키즈키씨 秋月氏일본어, 지쿠시씨 筑紫氏일본어, 하라다씨 原田氏일본어 등 주변 적대 세력과의 전투에서 항상 수적 열세에 놓였지만, 적진에 원군 도착 거짓 정보를 흘리거나 퇴로에 가짜 깃발을 세워 적을 혼란시키는 등 지략가로서의 면모도 보였다(시바타 강 전투 柴田川の戦い일본어[31][32][33], 겟포 나스미노진[90][87]).
  • 이와야 성 전투에서의 기개: 1586년, 시마즈 요시히사 島津義久일본어가 이끄는 대군이 이와야 성 전투를 시작했을 때, 쇼운의 병력은 763명에 불과했고 시마즈 군은 약 3만 5천 명(혹은 2만 명)에 달했다.[5]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도 쇼운과 부하들은 2주 이상 격렬하게 저항했다. 전투 중 시마즈의 장수 니이로 타다모토 新納忠元일본어가 항복을 권유하며 "어찌하여 불법을 가볍게 여기고 기독교에 빠진 오토모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가?"라고 묻자, 쇼운은 중앙 누각 위에서 "주군 가문이 강성할 때는 충성을 다투는 자가 많지만, 쇠약해졌을 때 목숨을 거는 자는 드물다. 그대 또한 시마즈 가문이 쇠퇴하면 주군을 버리고 목숨을 아낄 것인가? 무사로서 은혜와 인의를 잊는 것은 짐승보다 못하다"라고 답하여 적과 아군 모두에게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202][203][204][205][206] 쇼운 측에서는 도망치거나 항복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최후의 백병전에서는 쇼운 자신도 칼을 휘두르며 시마즈 병사 17명을 베었다고 한다. 결국 성이 함락되고 쇼운 이하 전원이 옥쇄했지만, 시마즈 군 역시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시마즈 군의 진격이 늦춰졌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일본어 군대가 규슈에 상륙할 시간을 벌어주어 결과적으로 시마즈의 규슈 통일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평가

  • 시마즈 다다나가 島津忠長일본어: 이와야 성 함락 후 한냐자카 般若坂일본어에서 쇼운의 수급을 검사하며 "우리는 보기 드문 명장을 죽였다. 쇼운 님은 군신(軍神)의 화신이었다. 그의 무훈은 일본에서 견줄 자가 없을 것이다. 친구가 될 수 있었다면 최고의 친구였을 텐데…"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1587년 규슈 정벌 후, 다자이후간제온지 観世音寺일본어에서 무네토라를 만나 "이 혼란한 하극상의 시대에 쇼운과 같은 충성스럽고 용맹한 무사가 진서 鎮西일본어, 즉 규슈에 있을 줄은 몰랐다. 쇼운이야말로 난세에 핀 꽃(乱世の華)이다"라며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고 전해진다.
  • 루이스 프로이스: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본국 보고서에서 쇼운을 "희대의 명장"이라고 극찬했다.
  • 기타 기록: "문무에 통달하고 덕과 지략이 뛰어나며, 사람들에게 정이 깊고 충성스러우며 사욕이 없었다. 옛날에도 드문 명장이다"[193], "쇼운은 평소 정이 깊었기에, 또한 그 충의에 감화되었기에, (부하 중) 한 사람도 절의를 잃지 않았다"[194] 등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인품은 의(義)에 기반하여 "의에 살고 의병(義兵)으로서 의에 죽었다. 가문의 용맹함도 인의의 용맹함이다", "현명하고 덕이 있어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그릇의 너그러움이 인(仁)으로 여겨진다"[193]고 기록되었다.

사후
다카하시 쇼운의 묘(오른쪽)와 이와야 성 전투의 전몰자 위령비(왼쪽 뒤편)[이와야 성 니노마루 터]

  • 이와야 성 유적에는 쇼운의 묘와 "아아 장렬하도다 이와야 성터(嗚呼壮烈岩屋城址)"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쇼운의 묘소는 두 군데로, 이와야 성에는 몸통 무덤이, 인근 한냐지(般若寺) 터 부근에는 머리 무덤이 있다고 전해진다.
  • 이와야 성 아래에는 돌무덤이 있는데, 시마즈 군에게 매수되어 성의 물길을 알려준 노파가 성 함락 후 쇼운을 기리던 영민들에게 붙잡혀 산 채로 묻혔다는 전설이 있다.
  • 이와야 성 전투의 격전으로 다자이후로 흐르는 소메가와 染川일본어 강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 쇼운과 다카하시 가신단의 기일인 7월 27일에는 지금도 후손과 연고자들에 의해 이와야 성 전투 희생자 추도 법요(이와야 제 岩屋忌일본어)가 쇼운의 보리사인 사이쇼지 西正寺일본어에서 열리고 있다.
  • 애용하던 태도(太刀)는 닌오 사부로 기요쓰나 仁王三郎清綱일본어이며, 차남 다카하시 무네마스 高橋統増일본어에게 물려주었다.[200]

4. 평가

오토모 씨 가문 내에서 카마치 아키모리와 함께 "위대한 기둥"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러한 명성과 기여 덕분에 이와야 성을 하사받기도 했다.

1586년, 시마즈 가문이 오토모 씨를 공격해오자[5] 많은 오토모 가신들이 가망이 없다 판단하고 시마즈 측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쇼운은 이와야 성 전투에서 약 763명의 병력만으로 3만 5천 명(다른 기록에는 2만 명[5])에 달하는 시마즈 대군에 맞서 철저히 항전하며 큰 피해를 입혔다. 이와야 성은 2주 이상 버텼으나, 결국 구원 가능성이 사라지자 쇼운은 성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포위 중 시마즈 지휘관이 "기독교를 믿는 부정한 오토모를 왜 섬기는가? 항복하라"고 회유했을 때, 쇼운은 "주군이 강성할 때 충성을 맹세하고 약해지면 배신하는 자들이 많으나, 나는 주군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그럴 수 없다. 은혜를 모르는 것은 짐승만도 못하다"라고 답하며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쇼운의 용기와 신념은 적이었던 시마즈 군사들마저 감탄하게 했으며,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보여준 그의 모습에 전장의 모든 이들이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쇼운은 전원 옥쇄하였으나, 불리한 상황에서도 의리를 지킨 장수로 후세에 평가받으며 이름을 남겼다.

무장으로서의 용맹함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들도 다수 전해지고 있다.

5. 작품

(내용 없음)

5. 1. 소설

작가제목출판사출판 연도비고
니시즈 히로미『전국 만가 다카하시 쇼운』소우분샤1997년이후 가쿠요쇼보 인물 문고 『다카하시 쇼운 전국 만가』로 개제 (2008년)
타키구치 야스히코『난리의 바람 젊은 날의 다치바나 무네시게』분게이슌주1981년이후 분슌 문고 (1986년), 가쿠요쇼보 인물 문고 『다치바나 무네시게와 다치바나 도세츠』로 개제 (2008년)
시라이시 이치로『마지막 한 사람』PHP 연구소2008년
야노 타카시『고군』고단샤2017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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